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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빵으로 된 사람.
    일상 속 축복/소설 2008. 12. 2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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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빵으로 된 사람.



    “ 실례합니다. 사람이세요? ”


    나는 그를 처음 만난 날 이렇게 물었다.

    어둑어둑한 2월 초, 공원 벤치에서


    빵 하나.


    사람에겐 누구에게나 우울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건 내게도 그랬고, 나는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걷는 버릇’이 있었다.

     그날은 슈퍼에 우유를 사러 나온 길이었다. 집 앞 슈퍼에 들어갔는데,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우유가 없었다. 다른 우유를 살 수도 있긴 했지만 그나마 있는 것들도 유통기한이 촉박했고,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 슈퍼를 나와 버렸다. 2월이었지만 별로 춥지 않았고, 집 앞에서 100여 미터 거리쯤에 있는 좀 더 큰 마트로 가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걷기 시작했다.

     일단 마트에 가서 원하던 브랜드의 우유를 샀다. 유통기한도 길었다. 괜히 마트 안을 30여분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우유가 든 봉지를 손에 들고 나왔다. 마트를 향해 왔던 길 보다 조금 먼 길로 빙 돌아 걷기로 했다. 핸드폰은 주머니에 있지만 종일 울리지 않았고, MP3는 가지고 나오지 않았고, 집에 가도 별다른 할 일도 없었다. 아무생각 없이 걷기에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멍한 기분으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바람도 세지 않고 날씨도 춥지 않았다. 삭막한 주택가의 가로수들은 모두 가시 같은 나뭇가지들을 하늘로 향해있었다. 차는 쌩쌩 달리고 사람들은 종종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한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도 걸었다. ‘사그락 사그락’ 우유가 든 봉지가 가끔 소리를 냈다.

     무작정 걷던 내 발걸음은 집근처 공원 안으로 들어섰다. ‘근린공원’ 꽤 큰 곳이다. 이런 주택가에 있기엔 아까울 정도다. 2월의 공원은, 나무도 삭막하고, 잔디도 메마르고 사람도 적어 황량하다. 춥지 않다고 해도 겨울은 겨울이니까 말이다. 몇몇 꼬마 남자애들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뿐이었다.

     나는 공원 안을 걷기 시작했다. 공원 전체를 빙 두 바퀴쯤 걸었을 때, 벤치가 옆에 죽 늘어져 있는 길의 어느 벤치 구석에 앉아있는 왜소한 한 남자가 신경이 쓰였다. 시간은 우유를 나러 나왔을 때와는 달리 이미 좀 어둑어둑해진 참이었다. 겨울은 밤이 일찍 온다.


     “실례합니다.”


     나는 그 사람 가까이에 가 말을 걸었다. 그는 약간 노티가 나는 중절모를 쓰고 있었고, 카키색 목도리를 코 밑에까지 덮고 검정색 모직 외투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또 말을 건넸다.


    “ 사람이세요?”


     그 사람은 고개를 들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니오.”


    그리고 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빵 둘.


     이미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아이들은 모두 어딘가로 사라졌다. 공원은 어둑어둑해져 짙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새소리도 없다. 적막하다. 그리고 그는 주저앉은 나를 미동도 없이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공원이었지만, 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두 바퀴 빙 돌 때 아무 움직임이 없던 그 사람이 분명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사람이라면 느껴져야 할 그런 느낌이 나지 않았으니까. 그저 그 사람은 막대기같이 앉아있었기 때문이니까. 처음엔 공원의 노숙자라 생각했다. 이런 큰 공원엔 종종 초록 소주병을 든 그들이 오곤 한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아니었다. 앉은 자세부터 행색까지 노숙자와는 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의심스런 사람에게 말을 거는 행동이 좀 위험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호기심은 언제나 두려움을 이기는 법이다. 판도라가 결국 상자를 열듯이, 무서워도 공포영화에 심취하듯이. 슬프게도 내 호기심은 두려움을 몰랐다.

     아무튼, 놀란 나는 그의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에게 손가락을 들어올려 보이며 다시 말을 꺼냈다. 믿기지 못하는 눈앞의 현실을 확인하고 싶어서.


    “당신...”


    “ 네, 빵이예요.”


     그가 대답했다. 맙소사, 그는 말 그대로 빵이었다. 그리고 난 물었다. 멍청한 얼굴로.


    “왜?”


     날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고 가로등의 희미한 노란 불빛도 켜졌다. 그리고 그의 얼굴모양이 좀 움직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좀 어색해하는 표정이었나 보다.

     “ 왜 빵이냐고요? 글쎄요...”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손에도 장갑이 껴있다. 카키색 털실로 짠 장갑이다.


     “ 너무 꽉 잡지 말아요. 빵이라 부서지거든요.”


    이것이 그와 나의 첫 만남이다.

      빵 셋.


     나는 그의 손을 조심히 잡았다.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딱딱했다. 엉덩방아를 제대로 찍었는지 엉덩이가 얼얼했다. 그의 옆에 앉았다. 다리에 힘이 없었다. 하지만 눈은 그의 얼굴을 쳐다본 그대로였다.

     그의 얼굴은 윤기 있는 빵 표면이었는데, 가로등 불빛 아래 더 빛나고 있었다. 잘은 안보이지만 모자 아래의 머리카락과 눈썹은 초콜릿 같았다. 그의 까만 눈동자는 재료가 무엇인지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눈 흰자위는 아마 마시멜로우 같은 느낌이 났다. 코 모양도 있고 귀모양도 있었다. 곁에 앉으니 맛있는 빵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그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 미, 미안합니다. 많이 놀랐죠? ”

     참 예의도 바른 빵이군.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앞을 내다봤다. 내 눈 앞에는 우유가 든 봉지가 공원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아까 주저앉을 때 떨어뜨리고는 놀라서 미쳐 줍지 않았던 것이다. 순간 머리가 띵했다. 내가 정신이 나간 건 아니겠지? 왜 빵 옆에 앉아서 그의 사과를 받고 있는 걸까. 눈앞이 흐릿해지면서 빵 봉지도 흐릿하게 보였다. 점점 추워졌고, 공원엔 다른 사람의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나를 알아본 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심지어 빵은 수줍게 말을 하기까지 했다. 보통 다른 사람들은 빵이 이렇게 말을 할 때 뭐라고 대답하지? 나는 말했다.


     “ 아, 네.. 저도 빵을 알아본 건 처음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빵과 나의 대화는 시작되었다.



    지인에게 보여줬는데 "이게 뭐야. 재미없어."라는 한마디에 중단된 소설.-_-.. 호련의 소심함이란 ㅋㅋ

    2007년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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