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복사저포기
'만복사저포기'라는 제목을 나는 생소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읽을 때도 만복, 사저포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만복사 저포기라고 읽는 것이라 아하, 그렇군 하고 감탄했다. 그런데 읽어보니 '이생규장전'과 같이 고등학교때 접해본 기억이 있는 작품이 아닌가. 반갑기도 하면서도 원문을 모두 접해본 것은 처음인지라 단숨에 무척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이 곳이다.
한 그루의 배꽃나무 외로움을 달래주나
휘영청 달 발으니 허송하기 괴롭구나.
푸른 꿈 홀로 누운 호젓한 들창가로
어느 집 이쁜 님이 퉁소를 불어주네.
외로운 저 비취는 제 홀로 날아가고,
짝 잃은 원앙새는 맑은 물에 노니는데
기보를 풀어보며 인연을 그리다가
등불로 점치고는 창가에서 시름하네.
시를 다 읇고 나자 별안간 공중에서 이상한 말소리가 들려온다.
"진정으로 자네가 좋은 배필을 얻고자 하는데 그 무엇 어려울 게 있으리요?"
이 소리를 듣고 난 양생은 속으로 상당히 기뻐하였다.
만복사저포기의 주인공 양생은 매우 재미있는 캐릭터이다. 시 두 수를 지어 읊었더니 공중에서 말소리가 들려서 절로 찾아가 부처님과 저포로 내기를 둔다는 발상이 참 장난스럽고 귀여웠다. 게다가 공중에서 이상한 말소리가 들려왔는데 매우 경탄한다거나 기뻐서 어쩔 줄 몰라 웃었다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표현 안하고 속으로 상당히 기뻐하는 것이다. 천상세계와의 연결이 한치의 놀라움과 조금의 의심도 없이, 마치 얼마든지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여겨지고 있다. 나는 이런 양생의 태도가 참 마음에 들었다. 설령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다 믿을 것 같은 이 소설의 세계는 나를 정말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과연 시작할 때부터 이렇게 기이하게 시작하더니 결국에는 한을 풀지 못한 영혼과의 사랑이라는 신비로운 결말로 끝났다. 마치 요즘 현대소설로 치면 동화와 같은 이야기다. 처음만난 양생과 그녀는 단번에 사랑에 빠졌으나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랑을 지켰다는 그 순수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물론 여타 대부분의 고전소설도 이런 경향이겠지만, 유독 만복사저포기에서 부처님과 내기를 하는 장난스러움과 귀신과의 사랑이라는 엉뚱함이 내게 마치 한편의 아름다운 동화를 연상시키게 했다. 게다가 그녀의 이상한 점에 대해 한점의 의심도 품지 않는 이생의 그 모습이 더욱 그랬다. 심지어 그녀가 그녀의 집에서 이생과 함께 머무를 때 이생에게 이곳의 사흘은 인간의 3년과 같다고 그만돌아가라고 말을 하는데, 이생은 그녀의 정체와 그녀의 집의 기이함을 의심하기 보다는 오히려 헤어진다는 사실에 놀란다. 이생은 비현실적인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나는 무척 몽환적이며 환타지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무척 좋았다.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은 결말이다.
그 뒤 양생은 결국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가산과 농토를 모두 팔아 저녁마다 재를 드렸는데, 하루는 그녀가 공중에서 그를 불러 말했다.
"당신의 은덕으로 저는 이미 다른 나라의 남자의 몸으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유명의 한계는 더욱더 멀어졌사오나, 당신의 두터운 은정에 깊이 감사를 드리옵니다. 당신은 다시 길을 깨끗이 닦아 저와 같이 속세의 누를 초탈하시옵소서."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녀가 무척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이런 결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작은 부처님과 내기를 하며 무척 발랄하고 가볍게 시작했던 소설이 결말은 비극이 되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다시 환생할 제 여자로 태어나지 왜 하필 남자인가!! 양생에게 더 이상의 사랑도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는 귀신의 몸으로서 양생을 유혹해 놓고는 자신은 남자로 환생한다며 유생에게 속세의 누를 초탈하라고 한다. 처음부터 완성되지 못할 것을 아는 사랑을 저질러 놓았으니 이제는 그런 불쌍한 양생에게 새로운 여자를 만나 즐겁게 살기를 권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그녀는 자신도 속세의 누를 초탈한다고 했지만 당연히 환생하면 옛 기억을 모두 잃을텐데 너무 뻔뻔하다. 게다가 양생에게 그런 권고를 하는 것이 무척 당돌하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조금 넘겨짚은 생각이나 정말 남자는 여자를 잘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김시습은 남자인데도 여자가 남자를 이렇게 휘두르게 만드는 글을 쓰다니, 물론 어머니를 위해 쓴 소설이라 할 지라도 그가 남존여비의 사상에 치우쳐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왠지 김시습도 무척 친근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