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생전- ' 저 남자는 주생같은 남자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나의 사랑스러운 동기는 내게 귓속말로 소근거렸다. 이거 주생전 읽어보니 주생이란 남자가 원래 여자 버리고 더 예쁜 여자 선택하는 이야기야. 엄청난 스포일러인 그녀 덕분에 나는 주생전을 읽으면서 과연 주생이 언제 배도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놀아날 것인지 읽으면서 대체 언제야!! 언제야!! 하는 의문에 휩싸여야 했다. 정말 읽느라 괴로웠지만, 분명 그렇게 될 거란 것을 알면서도 주생의 외도는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철에서 주생전을 읽는 동안 주생이 남몰래 선화의 방으로 잠입해간 장면을 읽을 때는 깜짝 놀라서 나의 머릿속은 멍해지고 전철의 덜컹거리는 소리는 커녕 주위의 잡음도 들리지 않았다. 고전소설이 주는 선입관을 또 한번 깨버린 것이다. 나는 눈물짓는 주생에게 고소함을 느꼈고, 점점 결말로 갈 수록 주생과 선화가 해피앤딩이 되지 않기를 바랬다. 그리고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물론 그 후의 일은 모르는 것이지만 (아마 그들의 질긴 인연으로 보아 결국 만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한 그들의 슬픔을 보며 통쾌해하며 책을 덮을 수 있었다. 선화라는 등장인물이 순하디 순하고 착해빠진 여자였다면 조금 마음이 약해질 수 있었으나, 그녀 또한 잔머리 잘 굴리고 질투심 많은 여자라 별로 애정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생전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과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같은데 이 곳이다.
몇 개월이 지난 뒤 배도마저 병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배도는 죽어가면서 주생의 무릎을 베고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다.
"저는 봉비의 뿌리로서 송백의 넉넉한 그늘에 의지하였는데, 어찌 꽃향기가 없어지기도 전에 소쩍새가 먼저 울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이제 곧 낭군과는 영영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비단옷이나 거문고 가락도 이제는 끝났으며, 낭군과 해로하고자 했던 오랜 소원마저도 이미 어그러지고 말았습니다. 다만 제가 죽은 뒤 낭군께서는 선화를 베필로 맞이하고, 제 유골을 낭군이 왕래하는 길가에 묻어 주시길 바랄 뿐입니다. 그러면 저는 비록 죽었을지라도 산 것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매우 이중적인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배신한 주생이 한 없이 미울텐데도 이렇듯 그의 행복을 비는 착한 배도의 마음에 탄복함과 또 한편으로는 주생이 자신을 이렇게 버리고 배신했는데도 바보같이 그가 잘 다니는 길가에 묻어 달라며 끝까지 매달리는 그녀의 한심한 모습에 불쾌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의 마음이 알듯 이해될 듯 하면서도 좀처럼 이해하고 싶어지지가 않았다. 과연 그녀는 조선시대 여인 같이 순종적이고 아무리 남자가 자기를 배신해도 따르는 순애보와 같은 여자였단말인가. 게다가 이렇게 한심하게 병들어 죽어버리는 것은 다 무엇인가. 너무 안타깝다. 주생은 마음은 변했어도 그녀를 관기에서 빼내주어 조상의 한을 풀어주어야 했다. 정말 주생이 싫다. 나이 어린 여자에게 빠져서 허우적대고 병드는 꼴이라니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게다가 하필 왜란이 일어났을 때 그런 사람이 올 것은 또 뭐냐. 그것도 오기 싫다는데 정말 마지막까지 내 심기를 불쾌하게 했던 작품이었다.
하지만 어찌보면 충분히 현실세계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바탕으로 쓴 글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이 더 슬프지만) 게다가 소설을 읽고서 사람 마음을 이토록 동요시킬 수 있는 것 자체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설 자체의 작품성으로 보자면 꽤나 칭찬해주고 싶다. 제발 바라건대, 이 소설의 현대 사회에 널리퍼져 주생같은 나쁜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배도같은 한국여성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쁜 남자를 보면 '저 남자는 주생같은 남자야'라고 말을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주생은 정말 여태껏 읽은 고전 소설 중에 최악의 남자다.